다른 일요일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일요일. 한가했고 서점엘 갔다. 시적시적 책 구경을 하려는데, 크리스마스를 앞둔 음악이 거슬린다. 내가 참 반기지 않는 크리스마스. 대충 둘러보고 나가려 했더니, 서점 초입에 진열된 책에 눈길이 머물렀다. 헌책. 소설가 이외수의 추천사가 먼저 눈에 보였고, 표지를 넘기니 이병진이라는 낯익은 사람이 보였다. 책의 제목은 「이병진의 헌책」이었다. 헌책. 듣는 것만으로도 정감있고 포근한 말이다. 이걸 제목으로 썼다니 또 한발 늦었다는 생각이 든다.
싱숭생숭함과 답답함을 같이 느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모르겠는데, 일요일 밤에 그랬다. 잠이나 자려고 불을 끄고 누웠는데, 역시 잠은 오지 않는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장면이 꿈에 나타날까, 잠드는 게 불안한 날이 며칠 째다. 며칠 전 꿈에서 누가 나한테 소리를 질렀다. 내가 정말 싫다고. 꿈이라면 제발 깨고 싶었다. 기적적으로 그건 꿈이었다. 만약 그것이 현실이었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했을지 상상이 가질 않는다. 다만, 그것이 현실과 별반 다르지 않아 꿈이든 현실이든 불안한 것이다.
불을 켜고 헌책을 펼쳤다. 초판 인쇄일은 아직 한참이나 남았다. 내년 1월에 인쇄한다는 책이 왜 벌써 서점에 있을까, 그것도 헌책이라는 제목으로. 어찌됐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겼다. 이병진이 찍은 사진과 그가 쓴 글은 별다른 긴장 없이 지나갔다. 그러다 파도치는 바다 사진에서 시계를 봤더니 어느새 자정을 넘겼다. 사진은 참 쓸쓸했다. 내가 사는 곳이 바다와 멀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절로 났다. 귓가에 예전에 들었던 파도소리가 철썩였다. 그것만으로도 참 쓸쓸하다.
월요일 아침, 눈을 떴는데 책에서 본 그의 아내 사진이 떠올랐다. 미인이다. 코미디언은 예쁜 아내를 얻는다더니 역시 그 말이 사실인가보다, 나도 그런 아내가 있으면 좋겠다, 인상 좋고 착하고 나를 사랑하는, 이라는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건 참 피곤한 일인 것 같다. 특히 요즘처럼 추운 날 늦은 밤에 오들오들 떨면서 집에 바래다주어야 할 것을 생각하니, 잠이 확 달아났다. 갑자기 윤종신의 노래가 생각났다. ‘사랑하기엔 먼지 쌓인 아버지 것도 낭만 있잖니’라는 노랫말.
사무실은 평소보다 분주했다. 주말에 바닥청소를 한다고 의자며 이러저러 집기들을 책상에 올려놨던 것을 정리하느라 소란스러웠다. 집중해서 일하기에 좋은 환경이 아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나는 일요일 밤에 읽던, 월요일 아침부터 생각이 났던 헌책을 읽었을 것이다. 아무런 긴장 없이 차분히 읽다보면 훌쩍 넘어가는 책이다. <‘사라져가는 것’ 그리고 ‘묵은 것’에 대한 진솔한 반추!> 출근길에 늘 지나쳤던 육교가 보였고, 한 때 사진을 찍겠다고 사들였던 필름카메라가 생각났다.
7년의 구애 끝에 아내와 결혼했다고 한다. 시간이란 늘 상대적이지만, 그래도 7년이면 누구에게도 그다지 짧은 시간이 아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7년이나 구애를 할 수 있을까 싶다. 만약 그것이 짝사랑이라면 그 전에 말라 죽을지도 모른다. 사정이 있어서 그랬겠지, 서로의 사랑으로 함께 보낸 7년이겠지, 싶다. 여느 직장인처럼 출퇴근을 하는 게 아니라, 아내와 좋은 곳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는 게 참 좋다는 그가 새삼 부럽다. 내년엔 예쁜 딸도 생긴다니 그것도 참 부럽다.
지난 것은 늘 아련하다. 때로는 예전의 그것이 그립다. 나에게도 그런 아련함과 그리움이 있다. 누구나 그렇듯. 어떤 사람에게는 그런 아련함과 그리움이 행복의 웃음을 짓게 하는 것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아닐 수도 있다. 그건 현재에 달린 것이다. 지금 행복하다면 지난 것은 자연히 행복한 추억이 되곤 한다. 그러나 지금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면 지난 것 또한 후회와 아쉬움이 남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살아온 날들이 억울하지 않으려면 지금 행복해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책의향기/행복&심리2011/12/19 11:25
이병진은 분명히 느릿한 말투로, 정성껏, 책을 엮었을 텐데. 나는 너무 빨리, 대충, 읽고 엉뚱한 말을 하는 것 같아 좀 면구스럽다. 책을 좀 어렵게 좀 있어 보이게 만들었으면, 아마도 조금이라도 더 천천히 읽고 봤을 텐데. 아무튼 글이 너무 편하게 읽혀도 탈이다. 글을 쓰고 사진을 찍은 이병진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 이름을 자꾸 들먹여 민망하다. 사람들에게 그가 더 친근하고 푸근하고 편안한 코미디언, 배우, 작가, 또 다른 무언가가 되길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