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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개 맡에 책 몇 권이 있다. 기분에 따라 골라 읽다보니 늘 서너 권 이상이다. 풀이 죽었을 때는 보통 산문집에 손이 가는 경향이 있다. 몇 번째 읽는지 모르는 『도시에서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를 펼쳤다. 책갈피가 꽂혀 있다. 어디까지 읽었는지, 어디서부터 읽을지는 중요하지 않다. 책은, 그저 읽다보면 좋다. 기분에 맞는 책을 읽으면 그만이다.

또, 책은 기분에 따라 다시 읽고 싶은 책도 되고, 그렇지 않은 책도 된다. 나의 책에 대한 판단은 대충 그러하다. 하나의 책을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거나 마음에 와 닿던 부분이, 시간이 지나 다시 읽을 땐 왜 내가 그랬는지 알 수 없을 때도 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많다. 전에는 생각 없이 지나쳤던 부분, 공감하지 못했던 부분이 새롭게 다가온다. 그러면 역시 책은 좋은 것, 좋아하는 책은 두 번 세 번 읽어도 새롭다는 것에 감사하다.

부탁이란 것은 내게 그럴 만한 능력과 힘이 있다고 상대가 판단하고, 그 도움이 필요한 때 이뤄진다. 핵심은 내게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이다. 부탁을 하는 입장에서 보면 내가 가진 것은 축복 받은 어떤 능력이다.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런데 부탁을 들어줘야 하는 입장에서는 복이 갑자기 재앙처럼 여겨진다. 누구에게는 복이 되는 것이 누구에게는 재앙이 되다니, 인생사란 복잡기묘하기 짝이 없다. 

                                                                                 (『도시에서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251쪽)


밝은... 밝은 사람이 되려면 그래야 할 것 같다. 모르고 있던 것은 아니지만, 책은 그것을 새삼 환기시켜 준다.

나이에 비해 회사생활을 오래했다, 고 사람들이 내게 그런다. 보통의 남자들이 조직생활을 시작하는 나이에 비하면 조금 이르기는 했다. 물론 그 전에도 이런저런 것들로 돈을 벌었지만, 조직생활과는 또 조금 다르다. 가령 ‘여럿이 함께’와 ‘혼자’의 차이가 있다.

첫 업무부터 줄곧 그랬다. 업무 특성상 사람들을 도와주거나 다그치거나 하는, 그런 경우가 많았다. 첫 직장에서 1년도 되기 전에, 나보다 한 15년은 회사생활을 더 한 사람이 그랬다. 높은 자리에 있을 때 사람들한테 잘해주라고. 물론 나는 높은 자리에 있지 않았고, 그 말은 좋게 말해 충고였다. 그 직장에서 한 3년 쯤 됐을 무렵, 나보다 한 25년은 회사생활을 더 한 사람이 그랬다. 밤길 조심하라고. 물론 나는 밤길이 무섭기도 했고, 그 말은 좋게 말해 걱정이었다.

내 잘못은 한 번도 생각한 적 없다.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불편한 것은 그들이었으니까. 나의 본분을 망각한 채, 나는 언제나 그들의 부탁을 들어준다고 생각했다. 부탁을 할 거면 예의를 갖춰야 하고, 나는 예의를 갖추지 않은 부탁에 대해 최선을 다해 매정하고 쌀쌀맞게 굴었다. 함부로 부탁하지 못하도록 늘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으며, 누구라도 말을 걸어오면 까칠 그 자체로 대응했다. 그렇다고 유세는 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타의모범을 보이며, 묵묵히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라고 여겼다.

직장을 여러 번 옮긴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물어보는 것, 도와달라는 것, 해달라는 것도 참 많다. 나는 그런 것들을 기분 좋게 해주는 적이 별로 없다. 그것이 부탁이 아닌 업무상의 협조요청 또는 협의 정도이기는 하지만, 나는 그럴 때마다 언짢은 티를 내며 마지못해 해주는 모습을 보여줬다. 아무 때나 와서 그러지 못하도록. 나한테 그런 말을 거는 것 자체가 싫었다. 제발 나 없이 척척 알아서 좀 하면 좋겠다는 교만이 하늘을 찌르다 못해 우주를 뚫고 헤맸다.

책은 그런 나를 좋은 말로 타이른다.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다는 것은 축복받은 능력이라고 나는 받아들였다. 이런 축복을 사람들을 멀리 내쫓는 재앙으로 써먹은 사람은 바로 나다. 오래전부터 이런 나에게 염증을 느꼈다. 그리고 마침 좀 밝아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차였다. 책은 딱 이럴 때 내가 필요한 수만 가지 도움 중에 중요한 한 가지를 주었다. 책을 펼치며, 내가 좀 밝아질 수 있게 도와달라는 부탁을 책은 기꺼이 들어줬다. 밝아지고 싶은 나에게 그럴듯한 명분을 줬다. 역시 책은 좋다.


Posted by 헌책방IC